느낌, 그 여운/블랙커피

이젤 easel을, 이제는 버리다...

가을길 2011. 10. 9. 19:47

 

 

 

 

 

 

서기 2011년 10월 9일 한글날,
벌써부터 별러오던 '겨울맞이 월동준비 대잔치 !'
- 쉬운 말로는 베란다 양쪽 창고 대정리 실시.

"이번에는 "당신 , 안쓰는 것들 다 버리기" 란다.

그래, 그래서 볼링셋트. 낚시 셋트, 캠핑세트, 헌 라켓들...

바리바리 폐기처분 결정.

"이것도..." 해서 보니까 이젤, 이젤이다.

그래, 버리자 그래... 이젤도 버렸다.
내한테로 와서는, 한 번도 다리 펴보지를 못했던...

 

 

2008년 09월 26일;

아마도, 아랫층 누구넨가, 이사를 갔거나, 오면서, 아니면
누군가가 쓰다가 이제는 그만 ... 싶어선지
물감 조금 묻은 이젤 easel이 뻘쭘히 계단 모퉁이에서,
한 열흘 넘도록 계단 구석지에 먼지에 덮여가고 있었다.

 

1979년, 내 첫 직장
부서가 다르고 입사도 나보다 1년 먼저였던
동갑내기 한녀석, 어릴적 부터 그림(유화)을 그렸더란다.
화가의 길 가고 싶다면서, 술 먹으면 늘 시무룩하던...

좁은 연립주택의 처가에 얹혀 살면서도,
외제 물감, 붓... 산다고 매달 2~3만원씩을 써버려서는, 봉급때면
마누라 하고 제법 다툰다던......

 

어느 초겨울, 단체 회식 끝나고 돌아오는길 - 우리, 같은 동네에 살았다.
"야, 우리집에 가자..."
" ??? 야통 다되가는데, 지금?"
"그래, 지금..."
이날따라, 그놈 눈빛이 너무 번쩍여서 거절할 수가 없었다.
구멍가게에서 과일 한 봉지 사들었었지만, 밤 11시가 넘은 시간...
내복바람의 꼬맹이, 잠옷차림의 그 부인, 처제들...
'괜히...' 후회스러웠지만, 녀석의 손에 이끌려서 

구석방에 들어가니, 벽 삼면 빼곡 빼곡 겹겹이 세워진,
액자에 끼워지지도 못하고, 벌거숭이로 서있던 그 그림들... ,

크고 작은, 아직 기름냄새도 선명한, 그리다 만 크고 작은 그림들도
벽에 기대고, 이젤에 얹혀 있었다.

그의 소중한 '꿈'이었다, 할 말이 없었다.
"니 이거 가주가라..., 내 인자 잘란다." 한 마디,
뭉툭 뭉툭한 터치로 그려진 바다의 풍경 한 장 주고서는, 털북숭이 그녀석
그대로 무너져서 잠이 들더라. 녀석의 아픔도 같이 잠을 잘 모양이던데......

 

그 그림, 나도 당장에 액자를 해 줄 처지 안되었기에
두르르 말려진 채, 월세방-전셋방-전셋집-아파트로
나를 따라댕기다가, 그냥 증발해버렸고,
그 없어졌음을 알고 난  20년전 쯤 부터는, 늘

늘, 지금까지도 미안한 마음, 갚을 수 없는 빚으로 남아있다.

녀석의 그 '눈빛'의 이야기를 아직도 기억하니까...

 

계단 구석지의 이젤,
오늘밤, 살풋 들어다가 몰래 뒷베란다 구석지에 세워 놓았다.

어쩌면, 스케치연습이라도 좀 해보면서 녀석의 기분을
다시 느낄 수도 있을랑가, 좀 덜 미안해지려나... 싶어서. 
참새같은 당신은 '뭘 줏어다 놨느냐'고 청소하면서 꽁시랑거리겠지만
내사, 대꾸 한마디 안 할 것이다.
나는 봉황이거든, 봉황. 하지만 빚 많이 지고 있는 봉황... 2008/09/26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

 

2011/10/09

잎새 성글어진 어설픈 가지에 붉어가는 감들이 유난하다.
그림쟁이 아니더라도, 저 하늘빛에 뭔가를 터치! 하고 싶음은.....

녀석도, 지금 파이프에서 연기 풀풀 품으며
기름냄새 진한 붓으로, 저 하늘에 뭉툭한 터치를 하고싶을래나.

이젠, 굳이 이젤 아니라도 그릴 수 있을 듯도 하다, 그런
그런 모든 마음들을
조용한 마음으로......